영조대왕의 업적, 생애, 정책 -탕평책/균역법/신문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영조의 생애와 업적
영조(英祖, 1694∼1776)는 조선의 제21대 국왕(재위 1724∼1776)으로, 조선왕조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으로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후궁 출신이라는 점과 이복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 등의 콤플렉스와 개인사적 불행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탕평책을 통해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했으며 이전의 그 어느 왕보다도 민생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 조선 시대 몇 안 되는 성군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조는 30세의 나이로 비교적 늦게 즉위했지만 80세를 넘길 정도로 매우 장수했기 때문에 그의 치세는 장장 52년에 달했으며, 이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최장수 군주였습니다.
영조는 후궁 소생으로 삼종혈맥을 잇는 등의 정치적 성과를 비롯하여 자손과 신하, 백성들에게 남긴 글과 글씨를 통해 그의 인간적 면모와 정치 철학 등을 살펴볼 수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탕평책
과열된 붕당 간의 경쟁을 완화시키고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한 정책입니다.
균역법 시행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했습니다.
신문고 재설치
억울한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업적을 남겨 조선 후기의 중흥을 이룬 왕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경종 독살설>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생감과 간장게장이며, 이로 인해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755년에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은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입니다. 경종은 조선 제20대 왕으로,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입니다. 1720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4년 후에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경종 독살설이 등장한 배경은 경종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데에서 비롯됩니다. 원래 몸이 허약하던 경종은 재위 4년(1724) 8월 2일부터 건강이 급격히 위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종은 병약했지만 마르고 병든 이미지가 아니라 비만 체형으로 아팠다고 하며, 실록에도 경종은 살이 쪘고 소화기관이 좋지 못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영조가 개입을 했든 안 했든 경종이 오래 살지는 못했으리라고 보는 의견이 다수입니다. 또한, 경종의 사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므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2. 영조의 정책
1) 탕평책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하여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고,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 붕당 간의 대립 완화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 노론의 독주를 막기 위해 붕당과 관계없이 인재를 두루두루 등용하였습니다.
- 붕당의 근거지로 변질되고 있던 서원들을 대폭 정리하였습니다.
- 같은 관청에 여러 붕당의 인물이 함께 근무하게 하여 붕당의 균형을 유지시키고자 하였습니다.
2) 균역법
균역법은 1750년(영조 26)에 시행된 법으로,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의 부담을 줄이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
기존에는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軍布)가 여러 폐단을 일으키면서 농민 경제를 크게 위협하자,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균역청을 설치하고, 감포(減布)에 따른 부족 재원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부세 개혁 방안으로 제시되었던 균역법은 농민들의 군포 부담을 줄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는 등의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기존에는 16∼60세 남자들을 대상으로 1년에 군포 2필을 납부하도록 하여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이 컸습니다. 이에 영조는 군포를 1필로 줄여주는 균역법을 시행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당시 농업 노동 인구의 감소와 생산력 저하로 인해 군역에 대한 부담 때문에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에 균역법은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 시키는 동시에, 국가의 군역 체제를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3) 신문고제도
조선 초기의 신문고는 등문고(登聞鼓)를 모범으로 삼아 만든 제도로, 1402년(태종 2)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이후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의금부 당직청에 북을 매달아 병조, 한성부, 사헌부에서 책임지고 운영하도록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 때에는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번거롭고 절차가 복잡하여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신문고의 설치는 조선 초 관리들의 권리 남용으로 인한 백성의 고통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며,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일까지 신문고를 사용하는 무질서한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신문고 사용의 제한을 엄격히 하여 사건사(四件事) 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문고의 효용은 민의창달에 결부하였다기보다 조선 초기에 특수한 신분층에 은총을 주고 한편으로는 관료의 발호(跋扈)를 억제하는 데 성과가 있었습니다.
영조가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킨 이후,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소통을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영조가 신문고 제도를 시행한 이유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킨 이후 상언·격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 중 하나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격쟁의 남발을 금제하는 한편 비사건사를 소원하는 외람화 풍조도아울러 차단하고자 하였습니다.
3. 영조의 아버지 (숙종)와 어머니(인원왕후)
영조의 아버지는 조선 제19대 숙종(肅宗, 1661∼1720)입니다.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재위 기간 동안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영조는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왕자 시절에는 연잉군(延礽君)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영조는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왕으로 꼽히며, 탕평책을 실시하여 붕당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경제 발전과 문화 진흥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균역법을 시행하여 세금 부담을 줄이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숙종은 총 6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자녀로는 3명의 왕비에게서 얻은 6남 1녀와 후궁에게서 얻은 3남 5녀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영조는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와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며,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영조의 어머니는 숙빈 최씨(1670∼1718)입니다.
숙빈 최씨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이자 제21대 영조의 어머니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입니다.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들어와 1681년(숙종 7)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을 때 12세의 나이로 인현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인현왕후를 섬기며 궁궐 생활을 했으나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자 모진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숙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영수(永壽)를 임신하여 1693년(숙종 19) 숙원(淑媛)이 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영수는 2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후 연잉군(延礽君) 이금(李昑:후의 영조)을 낳았습니다.
이후 1695년에는 귀인(貴人), 1699년 정1품 숙빈(淑嬪)에 봉해졌으며,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후에는 더욱 지극히 숙종을 섬겼으나 숙종이 희빈 장씨와 같은 일이 생길까 염려하여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4.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영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의 행동과 성격 때문에 영조와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고 학문에 뛰어나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점차 학문에 싫증을 느끼고 무인적인 기질을 드러내면서부터 영조와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학문과 정무적 능력에 불만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질책이 잦았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성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계속해서 어긋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왕세자 역할을 하면 왜 이렇게 나서냐고 꾸중을 들었고, 뒤에 물러나 있으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도세자는 점점 미쳐갔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세자가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는 영조의 장수도 있습니다. 영조는무려 81세까지 살았고 재위기간도 50년이 넘었습니다.
조선 시대 왕의 수명이 평균 40세가 살짝 넘는 수준이니 영조가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조는 자신의 건강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습니다. 이런 아버지에게 매일 같이 꾸지람을 듣는 아들은 결국 사람을 죽이는 행동을 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하고결국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결국 아들의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둡니다. 세손은 매일 울며 불며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애원하지만 영조의 뜻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궁 안에서 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렇듯, 사도세자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역사적 자료와 함께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이 사건은 영조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여겨지며, 영조는 1776년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 정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의 통치는 조선 역사상 중요한 시기로 평가되며, 그의 정책과 업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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