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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래 이야기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 난중일기, 한산대첩, 노량해전, 학익진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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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고, 난중일기, 한산대첩의 학익진과 노량해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 명량해전에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1.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의의

 
이순신 장군은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신 중 하나로 여겨지며, 그의 영향력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한산도 대첩'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해군을 지휘하며 한산도 해협에서 왜군 함대와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둔 전투입니다.
 
이를 통해 이순신은 조선의 독립과 국가 안보를 위한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그의 지휘력과 전략적인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국가 안정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충무(忠武)라는 시호는 1643년 인조 임금이 내린 시호이며, 내몸이 위태로워도 위로 받드는 것을 '충'이라 하며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치는 것을 '무'라 하여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린 것입니다. 시호란 죽은 인물에게 국가가 내려주는 이름입니다.
 
 

이순신 동상

 

2. 이순신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 중기인 1545년 4월 28일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에서 태어나 1598년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선시대의 장군입니다. 어릴적부터 전쟁놀이를 즐기고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며 문학과 시재에 뛰어나며 엄격한 가정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형제로는 두 형인 이희진과 이요신, 그리고 동생인 이우신이 있었습니다. 훗날 이순신 장군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에는 어머니의 가정 교육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직접 나무를 깎아 화살 등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화살을 잘 쏘아서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어른들이 있으면 맞추려고 하였기 때문에 다들 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라면서 말을 타면서도 활을 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이순신은 용모가 단아하고 정갈하였다'라고 묘사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성격은 매우 강직하고 곧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공과 사를 뚜렷이 구분하였으며, 원칙을 중시하고 청렴결백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신중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전략을 세우는 데에 뛰어났으며, 병사들을 꼼꼼히 챙기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1576년 식년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때 경상도 해역에서 왜군을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으며 옥포 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한산도 대첩에서는 학익진 전술을 사용하여 왜군을 대파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군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에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워 17일까지 쓴 7년간의 일기이며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쟁중에 쓰인 일기이기때문에 전란의 상황과 개인적인 생각, 군사 기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감정, 가족과 동료에 대한 애정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가치도 높습니다.
 
개인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 중 해군의 최고지휘관이 직접 매일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 소회를 현장감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물입니다. 전투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 뿐 아니라 당시의 기후나 지형, 일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기록도 전하고  있어 과거의 자연지형 및 환경, 서민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국보 제 76호로 지정되어있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충청남도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위치한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3. 한산도 대첩과 학익진

 
이순신 장군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산도 대첩'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의 침략에 맞서 이순신 장군이 조선의 해군을 지휘하며 한산도 해협에서 작은 철갑선으로 왜군의 강력한 함대를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전체의 흐름을 바꾸는 중대한 전투로 평가 받으며, 이순신 장군의 지휘력과 전략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학익진 전법>
 
학익진 전법은 적을 중심으로 날개를 펴듯 진을 치는 전법으로 적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으며, 함선의 배치와 이동 방향을 조절하여 효율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적함대의 중앙을 돌파하여 집중포화를 쏟아부어 적함대를 무력화시키는 효과적인 전법입니다.
 
학익진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표적인 <손자병법>, <무경총요>, <무비지>에는 학익진에 대한 설명이 없어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합니다.
 
우리나라 병서 중 처음으로 학익진이란 이름이 나타난 책은 문종이 쓴 <진법>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가끔 학익진을 사용했으나 보조진형의 하나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잘 모르는 무관들도 많았습니다. 이로인해 중종 때는 국왕이 직접 학익진을 연습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한산도대첩>
 
한산도대첩 또는 견내량대첩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의 승전 중 하나로,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내해에서 발발한 조선 구군과 왜군 수군 간의 전투입니다.
 
임진왜란의 전황이 바뀌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투 중 하나로 왜군 수군의 수륙병진을 완전히 박살낸 대첩이며, 이 한산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평양까지 승승장구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이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을 받지 못하여 평양성에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수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전라도를 공격하는 왜군의 움직임도 둔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왜군 함대를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에 해안에서 왜군이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버리는 것을 염려한 토요토미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주둔한 와키자카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와 그 외 가토 등 3인을 소집하여 군대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한산대첩은 열세의 조선 수군이 우월한 화기와 적절한 전법을 구사하여 왜군의 수군을 괘멸시킨 임진왜란 당시 최대 규모의 해전입니다. 당시 왜군측 병선은 모두 73척이었으며 조선 수군의 학익진을 바탕으로 한 화력 집중에 47척이 파괴되고 12척이 나포되는 괘멸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4. 노량해전과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이날 새벽,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철수하는 왜군 함대 500척을 맞아 화공전술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내 죽음에 경거망동 하지말고 계속 밀어 부쳐라"라는 말을 남기며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결국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200척을 격파하고 100척을 포획하여 불태웠으며, 왜군 수만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노량해전>
 
노량해전은 1598년 12월 16일에 일어난 전투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생애 최대, 최후의 해전입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를 이끌고, 철수하려는 고니시의 왜군 함대를 구조하려는 시마즈의 왜군 함대를 속여 노량해협에 유인한 후, 기습하여 관음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판옥선 60척과 협선, 방패선 180여 척에 병사는 6~7천명이 참전했고, 명나라 수군은 사선, 호선 300여 척에 판옥선 2척, 병사는 1만 5천~8천 명이 참전했으며, 왜군 수군은 안택선과 세키부네를 합쳐 최소 350여척에서 500척에 병사들은 2만2천~3천 명이 참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 강점인 대포를 이용한 사거리와 공격력을 활용했으며, 왜군의 공격력과 백병전에도 대응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또한 전략적으로 왜군의 퇴각로를 차단하였고 그 결과 극소수의 탈출을 제외한 대다수의 왜군 함대를 침몰시키거나 나포시켜 큰 승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노량해전에서의 승리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게 큰 의미가 있는 전투였으며, 이순신 장군의 희생과 리더십이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전투 이후, 왜군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고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노량해전 이후 조선 수군은 재건되어 남해안을 방어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또다시 침입할 지 모르는 왜구에 대비해 전력을 강화하고 군사 시설을 정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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