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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래 이야기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 및 기묘사화- 조광조의 개혁정치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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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를 바꾸려 했던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 및 기묘사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연산군 시대부터 중종 시대까지 활동하였으며,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평생 추구한 인물입니다.

 

 

 

 

 

 

 

 

1.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도학자, 정치가, 시인, 작가, 저술가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입니다.

 

조광조는 17세 때 평안도 희천땅에 유배된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이후 왕세자 교육 담당관으로서 중종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약하며,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하고 지방 향촌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유교적 도덕규범을 강조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책들은 기존의 권력층인 훈구파와의 갈등을 야기하였고, 결국 기묘사화라는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조광조는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하였으나, 그의 사상과 업적은 후대의 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을 성리학적인 이상 사회로 개혁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위로는 훈구세력을, 그리고 아래로는 지방의 수령 세력을 견제하면서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을 펼쳤습니다. 

 

소학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해 성리학적 질서 확산과 도덕적 이상향 구현에 노력하였으며 국왕의 솔선수범론, 소학과 도덕윤리 보급, 거병과 군자론 등의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중종 대의 대표적인 개혁 정치가로 꼽히지만, 그의 급격한 개혁 추진은 보수적인 성향의 훈구 세력과 대립하게 만들었고 결국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관직에서 쫓겨나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개혁은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으나 그가 추구했던 이상과 정신은 조선시대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 지치주의


지치주의(至治主義)는 조선 중종 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士林派) 유학자들의 정치사상으로, 유교의 사상과 이념을 정치·경제·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실제로 실현하여 요순(堯舜) 시대와 같은 태평성세(太平盛世)를 이룩해 보겠다는 이상주의적, 급진주의적 정치사상을 의미합니다.

 

이를 지지한 사람들은 스스로 시국을 담당하여 치군택민(致君澤民)을 수행하기 위하여 성현을 본받아 인심을 바르게 하고,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며, 군자(君子)를 친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여, 군신상하가 지성(至誠)으로 합심함을 신조로 삼았습니다.

 

그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추구했으며, 군주에 대한 철저한 성리학적 교육, 전국적인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실력과 파벌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채용 등을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군주가 성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군주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치주의는 조선 초기의 성리학이 건국 핵심세력인 관학파 및 그들의 후예인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교체시기 사회통합을 위해 다소 유화적으로 현실에 적용되었던 것과는 달리, 15세기에 접어들어 성리학적 정치이념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림세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강조되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정치사회의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에 철저하지 못했던 훈구파 세력 때문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3. 소학과 향약보급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소학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는데, 특히 조광조는 소학을 매우 중시하여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 배분하였고, 지방 오지에까지 소학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하였으며, 이는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향촌에 보급하는 동시에 지방에서의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사림파가 주도하는 성리학적 질서 확산과 도덕적 이상향 구현에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업적은 조선시대 사상사와 정치사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4. 왕도정치와 사림파

 

왕도정치는 왕이 백성들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왕이 백성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며, 사회적 평등과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왕도정치는 주로 유교 철학에서 강조되며, 조선 시대의 왕들이 추구했던 정치 이념 중 하나입니다.

 

왕도정치(王道政治)는 유교에서어진 덕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교리이자 정치사상으로, 덕으로써 인(仁)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맹자는 <서경>에 제시된 왕도의개념을 차용하여 이상정치의 개념으로서 보편화시켰으며, 왕도정치란 인의(仁義)에 의한 정치를 말하며, 패도정치란 인의를 가장한 힘에 의한 정치를 말합니다.

 




왕도정치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공자와 순자를 들 수 있으며, 공자는 중국 고대의 철학자로 도덕과 윤리를 중시했고, 순자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긍정하며, 왕이도리를 잘 지키면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사림파(士林派)는 조선 시대 중기(14세기 말 ∼ 16세기)에 성리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으로, 중소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방에서 성장하였으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종직, 정여창, 김일손, 이황, 조광조 등이 있습니다. 

사림파는 훈구파와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었으나, 이후에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는 내부 분열로 인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뉜 붕당은 서로 견제하면서도 상호 협력하여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5. 위훈삭제

 

위훈 삭제는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호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입니다. 

 

조광조가 위훈 삭제를 실시한 이유는, 그가 주장한 '지치주의'에 따라,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고, 그중에서 실제로는 합격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삭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광조는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신들 중 일부가 부당하게 공신에 책봉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공훈을 삭제할 것을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권력의 공명정대함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위훈 삭제는 공신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공신들의 부당한 혜택 문제 해결
정국공신의 수가 너무 많아졌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혜택이 과다하여 국가 재정이 낭비되고 있었습니다.


사림 세력의 성장
위훈 삭제를 주장한 조광조는 사림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이를 통해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 사림 세력의 지위를 높이고자 했습니다.

 

위훈 삭제는 공신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공신들의 지위와 명예를 손상시키고,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6. 기묘사화란?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조선에서 중종의 주도로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의 정치적 상황과 권력 구조를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기묘사화는 조광조가 주도한 개혁 정책과 그의 사후, 정광필, 김안로 등 사림파 인사들이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려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조광조의 개혁은 당시 훈구파 세력과의 갈등을 초래했고, 그로 인해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1519년에 중종이 사림파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하면서,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처벌받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 안당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고, 남곤, 심정, 김전, 홍경주, 고형산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릅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로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중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서 사약(死藥)을 받고 죽었으며, 기준(奇遵)·김식(金湜)·김정(金淨)·한충(韓忠) 등은 귀양 갔다가 사형당하거나 자결하였습니다.

 

그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홍언필(洪彦弼) 등 수십 명은 귀양을 갔으며, 이들의 처벌을 반대하고 두둔한 안당(安塘)과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형제 등은 파직되었습니다. 기묘사화는 남곤(南袞)·홍경주(洪景周)·김전(金銓)·고형산(高荊山)·심정(沈貞) 등의 훈구파와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들 간의 반목, 배격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림파 인사들이 유배되거나 처형 당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훈구파란?>

 

훈구파(勳舊派)는 조선 초기(1392년 ∼ 1592년)에 형성된 정치 세력으로, 주로 왕의 즉위나 국가의 중요한 사건에 공을 세운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중앙에서 활동하며, 경제적으로는 토지 소유와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도전, 조준, 태종, 세종 등이 있습니다.

훈구파(勳舊派)는 조선 초기 세조 때 이후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 집단을 이르는 용어입니다. 이들은 새 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큰 업적을 남겼고,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였으며, 편찬 사업에 종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사장에 치중하여 성리학 본연의 철학적인 면은 소홀히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숙주, 한명회, 정인지, 권람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와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성리학보다는 실용적인 학풍을 중시하였습니다.

 

 

 

 

 

 

7. 개혁정치가, 조광조

 

조광조는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기존 권력층인 훈구의 반발을 샀으며, 이로 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는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습니다.

중종은 조광조의 능력을 높이 샀으나, 그의 급격한 개혁 드라이브에 부담을 느껴 훈구의 편에 서서 조광조를 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종이 조광조를 제거한 이유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조광조의 개혁 정책이 기존 권력층인 훈구파의 반발을 샀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이 중종의 왕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선조 시대에 조광조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으며, 최고 관직인 영의정과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추증받고 서원까지 건립되었습니다. 이어 광해군 시대에는 문묘에 배향되어 명실상부 조선 유림의 큰 뿌리로서 다시 기억되었습니다. 

선조는 조광조가 제시한 방향을 충실히 따른 후배 사림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조광조는 다시 역사에 복권되었습니다. 

그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추구했으며, 군주에 대한 철저한 성리학적 교육, 전국적인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실력과 파벌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채용 등을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군주가 성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군주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소학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는데, 특히 조광조는 소학을 매우 중시하여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 배분하였고, 지방 오지에까지 소학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향촌에 보급하는 동시에 지방에서의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사림파가 주도하는 성리학적 질서 확산과 도덕적 이상향 구현에 노력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노력은 조선시대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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