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장군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귀주대첩의 주인공으로 유명합니다.
강감찬의 생애와 업적
948년 금주(지금의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었습니다. 983년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되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어릴 적 성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그의 성품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장군으로, 특히 전술에 능했으며, 협심이 강하고 부하들을 아끼는 성품으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부하 직원들과 백성들을 존중하고 배려하였으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했습니다.
1010년 요나라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40만 군으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을 때,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습니다.
이후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70세의 나이로 상원수가 되어 홍화진에서 거란군을 대파하였습니다.
귀주대첩 후에는 은퇴하여 관악사에 들어가 저술과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103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후 문하찬성사·추충협모안국공신(門下贊成事追忠協謀安國功臣)의 칭호가 내려졌습니다.
강감찬이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
강감찬이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전략적인 선택과 군사적 준비였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공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홍화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전략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또한, 거란군과의 전투를 대비하여 군사적으로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철저한 준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형을 활용하여 적을 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뛰어난 리더십
고려의 주요 장군으로서, 군대의 단결과 사기를 높이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그의 전략적 사고와 뛰어난 군사적 능력은 귀주대첩의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략과 전술의 발휘
귀주대첩에서는 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강감찬의 전략과 전술이 빛을 발했습니다. 거란군이 고려군의 병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하여 전투 의지를 약화시키는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다양한 무기와 장비
고려군은 거란군에 비해 다양한 무기와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불화살과 쇠뇌는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유기적인 협력 체계
고려군은 중앙 정부와 지방 관청의 유기적인 협력 체계를 통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기병 전력의 강화
고려는 제2차 여요전쟁 이후 기병 전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군은 거란군의 기동력을 제압하고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장수들
1차 고려거란전쟁은 993년(성종 12년) 겨울에 거란의 침공이 시작되어 일어난 전쟁이며, 2차 고려거란전쟁은 1010년(현종 1년)에 일어나습니다. 3차 고려거란전쟁은 1018년(현종 9년)에 발발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강감찬 장군과 함께 활약한 장수로는 귀주대첩에서 함께 활약한 강민첨 장군, 서희 장군, 양규 장군 등이 있습니다.
서희
고려의 문신으로,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한 후 원외랑을 거쳐 병관어사로 재직 중,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의 침입 때 거란 측 장수인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하여 교전을 치르지 않고 퇴각시킨 인물입니다.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한 나라'라는 주장을 통해 거란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고려의 영토를 인정받는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거란과의 통로를 열기 위해 강동 6주 지역의 할양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하여 고려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이러한 서희의 외교적 기지와 전략적 사고는 거란의 군대를 물러나게 하고,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영토를 확장하고, 거란과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양규
거란 2차 전쟁에서 활약한 고려의 장군으로,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 때 흥화진을 지켜내고 곽주·무로대·이수·석령·여리참 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여 많은 포로를 구출하고 고려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문신 출신의 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강감찬, 윤관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군사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양규 장군은 현종과 강감찬과 함께 고려 거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현종의 명령을 받아 효과적인 전략을 세우고, 전투에서의 지혜로 거란 군과의 전투에서 고려를 지원했습니다. 양규 장군의 지략은 전쟁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그의 두뇌적 능력은 고려의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강감찬
강감찬 장군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귀주대첩'에서 사용한 '귀주 10만 대군' 전술입니다. 이 전술은 거란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준비한 전략이었습니다.
1018년 12월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상원수가 된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수공을 써서 거란군을 패배시켰습니다.
그 후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은 거란군은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후퇴했지만, 병력 손실이 크자 바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연주와 위주에서 고려군의 협공을 받고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는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려의 유명한 장군으로는 윤관, 이성계, 최영, 박서, 김취려, 조충, 정지 등의 인물이 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의 배경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와 거란, 두 국가는 그 시대의 동아시아를 이루는 중요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거란은 고려를 통해 남쪽의 중국 진나라와의 통상을 확보하고 싶어 했고, 고려는 거란의 군사적 위협을 견디며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영토와 국력의 충돌'로만 보는 것은 너무 표면적인 이해가 될 수 있으며,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여 발생한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국제관계에서도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3차 고려 거란 전쟁이 일어났던 1019년까지 고려는 전시 체제를 유지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 상황에서 왕권은 한층 더 강화될 수 있는 환경이었고 그에 반하는 세력들은 숙청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호족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현종은 중앙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행정체제를 구축하며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호족들의 권위를 격하시켰습니다. 또한, 국가 통합 차원에서 팔관회와 연등회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숭불정책을 유지하며 민심을 얻는 노력도 병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거란의 3차 침공에 완벽히 대비할 수 있었고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은 이 점에서 고려 왕조의 기반을 더 튼튼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종은 이전처럼 몽진을 떠나지 않고 얼마 안 되는 병력에도 개경을 사수하는 모습을 보였고 전쟁 승리의 주역이 되어 왕의 권위는 한층 더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민심을 얻은 왕의 권위는 호족과의 관계에서 왕권이 완전히 우위에 서도록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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