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건국 영웅, 주몽의 생애와 업적, 주몽의 탄생설화를 알아보겠습니다.
1. 주몽의 탄생설화
주몽의 난생설화는 한국 신화에 고대 주요 왕조의 시조들이 다수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것으로, 천손 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주몽(朱蒙)은 고구려의 시조이자 동부여의 금와왕의 아들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는 주몽의 탄생과 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이다.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았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또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부여왕東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습니다. 유화는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자기를 유인하여 사통私通하고는 돌아오지 않아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 살고 있다 하므로,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시켰습니다. 어느 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입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쓴 <동명왕 편>은 주몽의 탄생과 성장, 고구려 건국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와 함께, 주몽의 뛰어난 능력과 용기, 희생정신 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며, 당시 고려인들의 자부심과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명왕 편>은 고려시대에 쓰인 작품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시각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일부 내용은 다른 사료와 충돌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주몽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다양한 자료와 연구를 참고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명왕 편>은 주몽의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자료와 연구를 통해 보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몽이 알에서 태어난 이유>
동명왕 편에서 주몽이 알에서 태어난 이유는, 주몽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몽이 하늘의 자손임을 의미하며, 그의 능력과 용기는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몽이 알에서 태어난 이유는 태양을 닮은 알이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몽이 태양과 하늘을 잇는 신성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 유화는 압록강을 다스리는 강의 신인 하백의 딸이었습니다. 천제는 말 그대로 하느님을 뜻하고, 그 아들인 해모수의 이름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천부신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유화의 이름은 버드나무 꽃을 의미하며 대지의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지모신을 상징했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각각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신성한 존재'라는 것은, 그 후손인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놀라운 이야기와 인물의 비범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금와왕(金蛙王)은 부여의 3대 왕으로,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의 뒤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습니다. 금와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해부루왕이 늙도록 아들이 없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을 때, 곤연(鯤淵)에 있던 큰 바위를 치우고 발견한 금빛이 나는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바로 금와였습니다. 금와왕은 영토 확장을 거듭하여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탈출에서 내려온 곳으로 추정되는 제1송화강까지 진출하고, 동쪽으로 읍루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등 신생 국가 고구려보다 훨씬 강한 국가로 나타났습니다.
유화부인(柳花夫人)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어머니로, 북부여의 왕인 해모수의 아내였으나 해모수가 떠난 후 동부여의 금와왕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압록강가에서 여동생들과 놀다가 북부여의 왕 해모수의 꾐에 빠져 그를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아버지 하백에 의해 태백산 우발수로 쫓겨났습니다. 동부여의 금와왕이 죽자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의 위협을 느껴 주몽과 함께 고구려로 도망쳤으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고구려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습니다.
2. 동명왕 (東明王) -주몽의 업적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은 부여국 출신의 추모왕(고주몽)입니다. 동명왕(東明王)은 고구려의 시조이자 초대 왕으로,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했습니다.
동명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에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건국 당시의 상황은 중국이 한 고조(유방)시기로, 고조선이 왕검성 전투로 인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상태였습니다. 이후 고조선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고, 이들과의 갈등 속에서 고구려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주몽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수많은 정벌 작전을 통해 영토를 넓히고 다양한 민족들을 통합하여 국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하였으며,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을 정복하여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냈습니다.
주몽은 주변국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받았으며,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변국들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그들과의 동맹을 통해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주몽은 고구려의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농업과 군사를 발전시키고 국내의 경제와 생산력을 향상하는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외국과의 외교를 통해 국제적인 신용을 쌓았으며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교류를 통해 고구려의 국제적인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3. 고구려의 발전
고구려는 동명왕의 리더십과 뛰어난 인재들의 활약으로 크게 성장하여,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삼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였습니다.
동명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는 부여의 왕족들의 저항, 식량 부족, 군사적 위협 등 다양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부여에서의 갈등
주몽은 부여의 왕자들과 갈등을 빚게 되어 부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망과 건국
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주변 국가와의 경쟁
고구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주변 국가들과의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국가의 안정과 발전
고구려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후,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고구려 705년의 역사동안 고구려는 강려한 군사력과 찬한란 문화를 꽃피운 국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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