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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래 이야기

공민왕의 생애와 업적, 원의 간섭기에 공민왕의 저항과 개혁정치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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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간섭공민왕의 저항, 생애와 업적,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공민왕의 생애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은 고려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통찰력을 보였으며,  고려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자 충혜왕의 동복 아우입니다. 1351년에 왕위에 올라 14세기 후반 고려의 개혁과 대몽항쟁을 주도한 왕입니다. 
 
공민왕은 1351년 10월 21일에 즉위하였습니다. 그는 무신정권의 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또한, 무신정권 이후 왕이 실권 없이 원나라의 복속체제 아래에서 겨우 서무를 결재하는 권리만 되찾은 상태였으나, 공민왕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 부서의 중요 부위를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노국대장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하며,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反元) 정책을 펼쳐 몽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으며 고려의 전통 복식을 되살리는 등 고려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권문세족을 억압하고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사회경제적으로는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책은 권문세족의 반발을 불러왔고, 여기에 외부 세력은 몽골과의 갈등도 겹쳤습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374년 공민왕이 정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타깃이 될 것이라 두려워한 최만생과 홍윤 등에게 암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2. 공민왕의 대표적인 업적

 
공민왕의 통치 초기에는 몽골 제국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으며, 국내에서는 권력 다툼과 정치적 혼란이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몽골의 압박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적 저항을 강화했고, 권력의 집중을 막고, 지방 자치와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공민왕의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정방 폐지, 전민변정도감 설치, 쌍성총관부 수복, 원의 연호 폐지, 권문세족 숙청 등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반원정책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원나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군사적,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고려는 원나라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회개혁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농민의 세금을 경감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농민의 삶을 개선하려고 했습니다.

문화발전
통치 기간 동안 불교와 유교가 발전하였으며, 문화적인 성과도 두드러졌습니다.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많은 문인과 예술가를 후원했습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3. 원 간섭기

 
원나라가 고려를 침략한 시기는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거듭되는 전쟁과 내부 분열로 인해 점차 저항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압력에 굴복하여 혼인 동맹을 맺게 되었고, 이는 양국 관계를 견고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몽골의 고려 침공 이후 고려가 원나라에게 항복하자 고려는 약 80년 동안 원나라의 반자치적인 봉신국이자 강제 동맹국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려의 왕은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면서 사위 국가라는 뜻으로 부마국(駙馬國)이라 불렸습니다.
 
 
 

 


원 간섭기(元干涉期)는 1270년경부터 1356년까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이며, 1350년대 원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고려 공민왕은 고려 내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면서 원의 간섭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고려의 기존 3성-6부 체제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첨의부-4사 체제로 격하되었습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격하되어 고려 전기 이래의 황제국 체제가 부정되고 제후국 체제가 정착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원나라의 여러 전쟁에 필요한 군대와 물자를 제공해야 했으며, 공물과 공녀, 엄인 등을 원나라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는 고려의 일반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끼쳤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고려 영토 안에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등 원나라의 지방관청이 설치되면서 영토 일부를 상실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고려의 전통적인 문화와 전통이 억압받고, 원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화되었습니다. 고려의 교육, 예술, 문학 등에서도 원나라의 영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변화들은 고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주성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고려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고려는 여전히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원나라와의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면서 복잡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4. 공민왕의 반원정책

 
고려의 반원 정책은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고려의 독립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정책은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반영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주적 외교 정책 수립: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습니다.
 
문화적 독립: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장려하며, 원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친원파 제거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를 제거하여 원나라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정동행성 축소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을 축소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 공격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 땅을 되찾았습니다.

전민변정도감 설치
강제로 노비가 된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노력을 통해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공민왕의 죽음 이후 고려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결국 공민왕의 개혁 노력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고려는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게 됩니다.
 
 
 

 
 

5. 노국공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 ∼ 1365년 3월 8일(음력 2월 15일))는 고려 공민왕의 적후(嫡后)입니다.

원 순종(元 順宗·추존)의 손자인 위왕(魏王) 베이르 테뮈르 (孛羅 帖木兒, 몽골어: Bayir Temür)의 딸로, 본명은 보르지긴 부다시리(몽골어:Borǰigin Budaširi, 한국 한자:孛兒只斤 寶塔實里 패아지근 보탑실리)입니다. 칭기스 칸의 7대손입니다. 
 
시호는 처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를 내렸다가 차후 원에서 내린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로 교체토록 하고, 결국 이를 합성해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로 했습니다. 우왕 때는 인덕태후(仁德太后)라 했습니다.

공민왕은 원 위왕의 딸 보타시(寶塔實理,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아들여 두 사람은 금슬이 매우 좋았습니다. 공민왕은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그녀가 죽었을 때는 정사를 돌보지 않을 정도로 슬퍼하였습니다.
 
노국공주는 1365년(공민왕 14)에 난산으로 사망했는데, 이때 공민왕은 그녀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이후 정세가 악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6. 고려말의 대외관계

 
공민왕의 사망 당시 고려는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이는 왕위 계승 문제로 이어졌습니다. 역사적 영향으로는 그의 사망은 고려의 정치적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후 그의 업적과 정책은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역사적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왕위 계승은 그의 사망 후 복잡한 계승 과정을 거쳤습니다.

공민왕의 사망 이후 고려의 대외관계는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습니다.

몽골의 압력
고려는 여전히 몽골의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다소 완화되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홍건적이 등장하였습니다. 홍건적은 고려를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왜구
일본에서는 왜구가 등장하여 고려 해안을 침입하였습니다. 왜구는 고려의 경제적 피해를 입혔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대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나,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대립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으며, 왕권이 약화되어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하고, 1392년에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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